본문 바로가기
book

폐간, 파리로 망명해 공산주의 공동체에서 생활

by 소소한이야기~!@ 2021. 12. 20.
728x90
반응형

폐간, 파리로 망명해  공산주의 공동체

1. 라인 신문은 진보적이면 자유주의적 일고 사회 개혁을 외쳤기 때문에 프로이센 정부의 가장 우선적인 검열 대상이었다.

마르크스는 라인 신문의 편집인을 사임했고 곧이어 신문은 폐간되었다. 마르크스는 신문 편집장 자리를 내놓으면서 

친구인 루게에게 자신의 심정을 이렇게 토로했다.

 

 

 

2. 자유를 위해서 노예 봉사 자체를 실행하는 것 그리고 곤봉 대신 바늘을 가지고 싸우는 것을 고약한 일입니다. 나는 위선

멍청함, 뻔뻔한 권위와 우리들의 이첨과 등 돌리기 그리고 문자에 얽매이는 것에 지쳐버렸습니다. 나는 독일에서 더

이상 아무것도 시작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는 인가 자체가 위조됩니다.

 

 

 

 

마를 크스는 라인 신문이 프로이센 정부에 의해서 폐간되고 편집인인 자신이 구속될 위험이 눈앞에 다가오자 파리로 망명의 길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비록 독일에서는 자유주의 투쟁징 불가능했지만 프랑스에서는 가능하리라는 것이 마르크스의 생각이었다. 그런데 예니와 함께 무작정 파리로 망명한 마르크스의  생각이었다. 그런데 예니와 함께 무작정 

파리로 망명한 마르크스에게는 당장 입에 풀칠할 일이  걱정거리였다. 이때 친구 루게가 독일-프랑스 연보라는 잡지사에서 일하면서 독일에서 금지되었던 독일 연보를 출판할 수 있고 하니 그 잡지사에 취직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제의를

했고 마르크스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가리로 망명하기에 앞서 1843년 10월 말까지 마르크스는 예니와 함께 크로이츠 나하에 머물면서 프랑스 역사와 철학을 공부했고 헤겔 법철학에 대한 비판적 연구에 몰두했으며  또한 독일-프랑스 연보 

잡지에 실릴 논문 준비에는 여념이 없었다.

 

 

파리에서 마르크스는 프랑스 사회주의자들과 혁명역사에 관해서 배울 수 있었고 특히 모제스 헤스 프루동과 같은 

사회주의자들과 교분을 쌓을 수 있었는데 프루동과는 각별한 사이를 유지하다가 종말에 가서는 틀어지고 말았다.

독일-프랑스 연보 가 무신 롤 색채를 띠었다는 이유로 대부분의 프랑스인들이 이 연보를 외면했기 때문에 연보

잡지의 출판도 수월치 못했고 파리에서는 마르크스의 생활은 여전히 궁핍할 수밖에 없었다. 마르크스는 파리에서 

독일인들과의 접촉을 가능한 한 피하고 프랑스 노동자 집회에 자주 참석했는데 그 집회에서 큰 이나를 받았다. 

공산주의 성향을 가진 프랑스 수공업자들은 공동체를 필요로 했으며 사회주의적 프랑스 노동자의 단체를 구성하려고

했다. 마르크스와 예니는 실험용으로 세워진 공산주가 공동체에서 한동안 루게 가족화 함께 살 수 있었다.

그러나 루게와 마르크스의 우정은 곧 께져버렸다. 루게는 마르크스가 독일-프랑스 연보를 위해서 쓴 논 무을 퇴짜 놓았던

것이다. 루게는 자유주의자였지만 매우 편협한 시민의 기질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루게가 포이어바흐에게 보낸 서신에는 대강 다음과 같은 내 요의 글이 있다.

 

 

 

 

그는 엄청나게 많이 읽습니다. 그는 엄청난 집중력을 가지고 연구하며 비판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무것도 끝맺지 못하며 어느 곳에서나 중단하고 언제나 다시 새롭게 끝없는 책의 바다에 빠져들고 맙니다.

그는 학자와 작가로 태어났지만 언론인으로서는 완전히 글렀습니다. 마르크스는 한때 하인리히 하이네와 친교를

맺기도 했지만 프랑스 정부가 제안한 연금을 하이네가 받아들이자 하이네를 가리 커 더러운 오물을 받아먹는 늙은

개라고 욕하면서 하이네와 결별했다. 당시 하이네는 자유주의자였기 때문에 공산주의의 무신론이 그의 관심을

끌었던 것이고 사유재산 부정이 그의 관심을 끌었던 것은 아니었다. 마르크스는 박사학위 논문을 기초 삼아 1843년

헤겔의 법철학 강요를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다. 마르크스가 보기에 정치적 국가는 자연적 기초인 가족과

인위적 기초인 시민사회 없이는 성립 불가능함에도 불구하고 헤겔을 국가이념에 의해서 가족과 시민사회가

성립한다며 전혀 반대의 주장을 하고 있었다. 헤겔은 국가이념을 주어로 그리고 가족과 시민사회를 술어로 보지만

마르크스는 오리려 가족과 시민사회를 기초로 술어인 국가가 성립한다고 보았다.

 

 

 

 간단히 말해서 마르크스는 정신적 이념이 원리이고 현실세계가 이원리에 따라서 전개된다는 헤겔식의 법철학에

정면으로 반대했다. 마르크스는 어디까지나 경제현실 곧 노동해서 먹고사는 현실이 바탕이 되고 그런 바탕 위에서

가족과 시민사회가 형성되고 이를 기초 삼아 정부나 법이 생긴다고 보았다.  파리 망명시절 마르크스는 이전에

베를린에서 잠시 만났던 엥겔스를 다시 만났다. 마르크스는 죽을 때까지 엥겔스와 공동으로 저술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가족의 생계를 전적으로 엥겔스에게 도움받았다.

엥겔스는 바르멘의 공장주 아들로 마르크스보다 두 살 아래였는데 자신이 직접 물건을 파는 상인이었으며 영구의

경제이론에 밝았고 마르크스에겐 결여된 실물경제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마르크스는 그런 엥겔스에게 필 여할

때마다 도움을 받았다. 파리 망명시절부터 브뤼셀 망명시절을 거쳐 런던 생활까지 마르크스는 일가는 전적으로

엥겔스의 도움에 의해서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