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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변호사

by 소소한이야기~!@ 2021. 12.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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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테르, 루소, 칸트 등의 책을 섭렵한 아버지의 '자유사상'을 이어받은 마르크스

출처-철학의 끌림. 강영계

 

1.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은 업다는 말이 있다. 마르크스주의는 사상은 마치 엄청나게 큰 

호수와 여러 갈대의 강물들의 연속처럼 보인다.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라는 큰 호수는 에피쿠로스와 플로티노스 등의 강물로 흘러간다. 이 강물은 다시 중세의

아우구스 티 누수와 토마스 아퀴나스라는 호수로 모인다. 이호수의 물은 르네상스라는

강물을 거쳐서 로크  흄 데카르트 스피노자 등의 강물을 지나 18,19세기의 칸트 헤겔 등의

호수로 흘러든다 우리들은  현대 초반에 하나의 엄청난 사상의 호수를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마르크스다.

 

2. 마르크스주의를

뿌리로 삼은 공산주의는 20세기 초반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러시아 동구라파 중국 쿠바 베트남 북한 등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 역할을 담당

해왔다. 1989년  동독이 무너지고 러시아 동구라파가 공산주의를 탈피했지만 중국을 비롯한

몇몇 국가에서는 여전히 마르크스주의가 정치의 토대를 이루고 있다. 과연 마르크스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한 사상가의 사상을 올곧게 붙잡기 위해서는 그 사상가 개인의 특징과 

아울러 그의 사상적 배경과 사상의 형성과정을 꼼꼼히 챙기는 일이 중요하다.

 

3. 칼 하인리히

마르크스는 프로이센의 라인 주에 속하는 당시 인구 1만 2천 명이었던 시골 도시

트리어에서 태어났다. 변호사인 아버지 하인리히 마르크스와 어머니 헨리에 터 프레스부르크

의 집안은 모두 유명한 랍비의 계보를 가지고 있었다 랍비의 자녀들은 다른 랍비의 자녀들과

결혼하는 오랜 전통에 따라 마르크스의 부모도 결혼했다 랍비의 유대교의 성직자이지만

가톨릭의 신부나 개신교의 목사와 은 역할이 달랐다. 랍비는 예배를 주관하기보다 

오히려 유대교 경전 전문가로서 유대 집단에 문제가 생길 경유를 학문적으로 해석해서 실제로

응용하는데 많이 기여했다.

 

4. 당시 유대  공동체는 시나 국가의 지배를 직접 받지 않고 시와

국가를 대변하는 랍비들이 유대 공동체의 고유한 종교, 경제, 문화 등을 앞장서서 이끌어나갔다.

어떤 마르크스 해설가에 의하면 마르크스의 피 속에는 랍비들의 지성적, 학문적 전통이 

녹아들어 있어서 그와 같은 전통이 우장한 꽃을 피울 수 있었다고 한다. 마르크스의 아버지

하인리히는 마르크스가 출생하기 바로 전 해에 개신교로 개종했다. 개종의 이유는 두 가지로

알려지고 있다. 첫째 1815년 이후 나폴레옹에 의해 공공연히 유대인 박해가 이루어졌고 그 

이우 프로이센 정부에서는 유대인 박해가 한층 더 강화되었다. 하인리히는 변호사로서 공직에

취직하여 남부럽지 않게 살기 위해서는 과감히 개신교로 개종할 필요를 절실히 느꼈다.

 

5. 당시

프로이센 정부는 유대인이 학교 선생이 되거나 정부 관리나 되는 것을 철저히 금지했다.

결국 하인리히 유대교로 똘똘 뭉친 친척들과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19세기 초반 독일은

빌헤름 3세의 통치하에 비스마르크가 강력한 정치력을 발휘하여 여러 봉건국가들을 합하여

프로이센을 가장 강력한 국가로 만든 후여서 아직 정치 경제적으로 안정 죄지 못한 혼란기였다.

둘째, 하인리히는 시인 하이네와 마찬가지로 자유로 눈 정신의 삶은 갈구했기 때문에 개신교로 

개종했다. 유대 집단은 유대 교회를 중심을 유대인들만 똘똘 뭉치고 오직 만을 독단적으로

믿는다는 사회였으므로 하인리히는 숨통이 막혔다. 하인리히는 청년시절 볼테르, 루소, 칸트 등

자유사상가들의 책을 읽으면서 자유로운 삶을 염원했다. 아버지 하인리히의 자유정신은

마르크스에게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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