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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2

납처럼 죽어가는 아기를 붙들고 통곡하는 마르크스 _오, 불쌍한 내 아기, 프란치스카! 못난 이 아바를 용서해다오! 런던에서 마르크스는 궁핍의 절정을 맛보아야 했다. 마르크스는 철저한 무산계급에 속했고 영국 정부는 급진 자유주의자요 사회개혁가이며 공산주의자인 마르크스에게 국적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적당한 일자리를 구하기 힘들었다. 마르크스는 아내와 하녀 헬레네 데무트 그리고 세 명의 자녀와 함께 두 칸짜리 방에서 기거했다. 마르크스의 생활이 어느 정도 찢어지게 가난했는지는 그가 외출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는 사실만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마르크스는 수시로 푼돈이 필요할 경우 옷가지를 전당포에 맡겼고 조금 여유가 생기면 다시 옷을 찾았다. 종이 살 돈이 없을 때가 많아 마르크스는 원고를 작성하지 못해 자주 애태웠다. 이런 상황에서 딸 프란치스카가 태.. 2021. 12. 25.
런던 에서의 망명 생활 ,지독한 가난. 불행과 맞서다 런던 에서의 망명 생활 ,지독한 가난 물론 브뤼셀 시절의 마르크스와 그의 몇 안 되는 친구들이 불같은 혁명의 확산을 굳게 믿은 것은 아닐지라도 반 혁명 세력이 승리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프로이센과 프랑스 정부는 급진적인 자유주의적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억압했다. 1년 넘게 투쟁한 결과 마르크스와 친구들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의한 혁명적 민주주의란 현실에서 몰락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냉정한 마음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런던으로 망명하기까지 마르크스의 행적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848년 마르크스는 쾰른에서 찰스 데이너와 앨버트 브리스베인을 만났는데 그들은 의 편집인들이었다. 이들과의 안면이 계기가 되어 런던에서 마르크스는 의 유럽 통신원이 되어 런던에서 마르크스는 의 유럽 통신원이 되어.. 2021. 12. 23.